낯선 이방인인 나에게 먼저 다가와 준 건 교회 할머니들이었다. 특별한 할머니(special grandmother)가 되어준 베티 할머니를 비롯해 상큼하고 부드러운 향기를 맡아보라며 자신의 정원에서 꽃을 꺾어서 가져다준 진(Jean) 할머니, 스콘이 이토록 부드럽고 맛있을 수 있다는 걸 알려준 도로시(Dorothy) 할머니, 내가 뭘 하든 감탄하며 “You are clever girl(넌 정말 똑똑해)”라고 말해주는 격려 왕 마가렛(Margaret) 할머니, 모두 매주 목요일 아침 열리는 교회 성경 공부에서 처음 만났다. 영어도 못하지만 그나마 미국식 발음에 익숙해 있던 내게 영국 악센트, 뉴질랜드식 영어 표현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도저히 집중이 안 되는 날에는 할머니들의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어. 베티 할머니 얼굴에는 왜 이리 세로 주름이 많지? 도로시 할머니 이마에는 동그란 주름이 많네.’ 하라는 성경 공부는 안 하고 마음속으로 할머니들의 얼굴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며, 웃으며 생기는 너그러운 주름만이 좋은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할머니들의 미간에는 인상을 찌푸릴 때 생기는 세로 주름이 많았다. 가만히 지켜보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공감해 줄 때 생기는 주름이었다. “Oh hoo, too terrible.(끔찍해.)”, “Oh gosh.(맙소사)”, “That’s disgusting.(너무 싫어.)” 하며 같이 흥분하고 안타까워하면서 베티 할머니의 얼굴에 주름이 졌다. 또 도로시 할머니 이마에는 눈썹 위로 초승달 모양의 주름이 졌는데, 할머니가 놀랄 때마다 눈을 크게 뜨면서 생기는 것이었다. 사려 깊은 할머니는 먼저 안부를 묻고 다른 이의 이야기를 경청했는데 그 이야기에 빠져들어가 감탄하며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 동그란 물결이 퍼지듯 이마에는 잔잔한 주름이 깔렸다. 그저 웃는 주름만 있는 할머니는 없었다. 문득 그게 이상한 거다 싶었다.
주름은 우리의 인상을 넘어 우리네 인생을 만든다. 누군가를 걱정하며 찡긋, 나처럼 아파하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찡긋, 내가 겪어본 적은 없지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다른 이의 아픔에 이입하며 찡긋,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감동하며 찡긋, 아픔을 느끼거나 아픔을 함께 짊어질 때 우리는 깊은 주름이 진다. 어쩌면 그토록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 시기에 내게 드디어 단단한 주름살이 하나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목표지향적이고 결과물이 있는 일만 좋아하던 나에게 먹으면 사라지고 마는 요리와 매일 수고를 해도 티가 안나는 청소를 반복해야 하는 가정주부의 삶, 게다가 갑자기 뿌리가 뽑혀버린 듯한 무엇보다 커리어가 끊겨버린 타국에서의 삶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동시에 외국인에 대해 사회적 약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에 대해 공감하게 됐다.
나도 할머니들처럼 다양한 주름이 생겼으면 좋겠다. 아무런 시도도 아픔도 없는 매끈한 얼굴보다 예상치 못한 갈래길을 맞닥뜨리고 헤쳐나가며 또 주저앉고 되돌아 걷고 있는 이들을 공감하며 굴곡진 얼굴이 되고 싶다. 베티 할머니가 늘 내게 하시던 말씀이 있다. “Life is a challenge.”(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야.) 할머니의 주름살이 시간을 품은 아름다운 무늬로 보였던 것은 할머니의 삶이 시도와 실수, 고난과 회복의 패턴으로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뜨개질이 지루해 보이는 단순 반복들을 거쳐 단정한 무늬를 만들듯이, 할머니들의 일상도 요리, 청소, 운전과 같이 사소한 일들의 연속이었으나 주변을 아름답게 만들어갔다. 아무리 작은 일이더라도 꾸준히 반복하면 흔적이 남는다고 믿는다.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주름살이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