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에게 소가 아프면 수의사를 부르느냐고 물었다. 그는 흔한 질병이면 자신이 직접 항생제를 주사해서 치료한다고 말했다. 수의사를 시골 지역에까지 부르는 건 비용이 많이 들고 힘들기 때문에, 소들을 잘 관찰해서 아픈 이유를 알아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주의 깊게 관찰하면 다 알 수 있어. 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가 위쪽으로 올라가 있으면 행복한 상태야. 보통 배가 아픈 경우 귀를 아래로 내리고 있어. 소들도 사람과 비슷해. 우리가 슬플 때 고개를 숙이게 되듯이 소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면 아프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는 양 목장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파머라면 스스로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할 수 있어야 하며, 필요한 것이 없으면 직접 만들어서 돌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낙농업에 대한 수업을 듣고, 17살 때부터 다른 농장에서 일꾼으로 일하며 경험을 쌓았다. 유튜브도 없던 시절, 모르는 것이 생기면 이웃 농장에 찾아가 물어보고, 전문 배관공, 전문 건축가를 찾아가 물어보며 기술을 익혔다. 그에게 파머란 직업이자 삶의 방식이었다. 송아지들에게 먹일 우유를 일일이 들고 나르는 게 힘들어, 큰 우유통에서부터 각 막사로 이어지는 파이프를 연결해 우유를 나르는 반자동 시스템을 개발해 내기도 했다. 자신이 세운 임무를 완수했을 때 행복을 느낀다는 그를 보며 파머는 '개척자'라는 말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파머의 장점은 은퇴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로저의 주변에는 76살, 93살 등 노령의 나이에도 정정하게 일하고 있는 이들이 많고, 그 역시 몸이 허락하는 한 오랫동안 일하고 싶다고 했다. 사무직의 경우 나이가 들수록 빠르게 변하는 기술과 트렌드 때문에 도태되기도 하지만, 파머라는 직업은 연륜을 가치 있게 여긴다. 나이가 들수록 생활의 지혜가 더해지고 그동안 쌓인 경험 때문에 문제를 빨리 파악하게 된다. 노익장이 활약할 수 있는 분야라는 점도 좋지만, 내가 느끼는 파머라는 직업의 멋진 점은 손을 사용해 직접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핸디맨(Handyman)이어선지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로저는 아내 아니타(Anita)의 생일에 한 손에 붓을 들고 있는 작은 곰 인형을 선물했다. 당시 아니타는 빈 집으로 방치돼 있던 목장 안의 작은 집(cottage)을 페인트칠하며 수리하고 있었는데, 붓을 든 인형을 보며 당시를 회상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와, 붓을 든 인형을 다 파네."라고 말하자, 로저는 "아니, 내가 만든 거야."라고 무심하게 말했다. 남편이 투박한 큰 손으로 작은 곰을 붙잡으며 인형의 손에 붓을 달고 바느질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귀여웠다고. 이렇게 손수 선물을 만드는 낭만은 번화한 도시에서 떨어져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가치를 알아야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목장을 보며 인생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